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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뒤뜰에는 수령 500여 년 된 동백나무 3000여 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늘 아래 열린 지장기도도량 도솔산 선운사, 금동보살좌상, 도솔천 내원궁, 대웅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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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 선운사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과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운 자태는 시인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입니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산 도립공원 내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입니다.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선운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고, 영산전목조삼존불상, 육층석탑, 범종, 만세루, 백파율사비 등이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사내에 있는 선운사박물관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279호)을 비롯한 고려불상, 조선시대 탱화, 석씨원류, 선운사사적기 등 수많은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으며 경내의 동백나무숲, 장사송, 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이 근처에는 도적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가 도적들을 교화하여 소금 굽는 일을 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감사의 의미로 매년 선운사에 소금을 바쳤다는데 이 풍습은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효정스님이 퇴락한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습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따라서 시대적, 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무기가 살던 큰 못이 있었다. 용이 되려다 끝내 승천하지 못한 이 이무기는 악행을 자행했고 사람들은 비탄에 빠졌다. 이에 검단선사는 이무기를 교화시키고 그 터에 절을 짓기로 발원하였고 돌과 숯을 던져 못을 메워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마을에는 눈병이 크게 돌았는데 검단선사를 도와준 사람들은 눈병이 씻은 듯 나았다. 이를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숯과 돌을 가져왔고 이무기가 살던 커다란 못은 금방 메워졌다. 하지만 이무기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검단선사는 합장을 하고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하늘에서 동진보살이 팔만사천 신장을 거느리고 강림하였다. 극락으로 천도하는 지장 성지가 도솔산에 열린 것이다. 결국 이무기는 참회하며 도솔산을 떠났고 이 자리에 비로소 사찰을 세웠다. 땅 위에 펼쳐진 지장의 세계 그리고 천신이 노니는 하늘 그 사이 구름 한 조각 검단선사는 이를 보며 사찰의 이름을 선운사라 지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선운사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세가 더욱 번창하였다고 합니다. 한때 90여 개의 암자에서 3000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대가람의 풍모를 자랑하였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사찰이 모두 불에 타 사라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선운사는 빠른 속도로 재건되었습니다. 지장보살의 품 안에서 지치고 아픈 마음을 위로받고자 했던 백성들의 염원, 이 염원이 선운사 재건의 커다란 동력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어져 온 사람들의 굳은 신심 덕분에 선운사는 해동에서 으뜸가는 지장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금동보살좌상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솔산을 지켜온 선운사의 여러 전각과 불상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묘한 사연을 품은 불상이 있으니 선운사 지장전에 모셔진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입니다. 문화재 약탈이 극에 달했던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선운사의 금동보살좌상도 도난을 당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상을 훔친 일본인은 그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불상이 매일 밤마다 꿈에 나타나 준엄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불상을 팔아 넘겼지만 불상을 소유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꾸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불상을 소유했던 일본인은 선운사에 불상을 다시 모셔가 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1938년 11월 그렇게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에 선운사 금동보살 좌상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불상의 놀라운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고 선운사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다고 합니다.
도솔천 내원궁
선운사 도솔암에서 백팔 계단을 오르면 험난한 바위 위에 세워진 도솔천 내원궁에 또 한 분의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은 두건을 쓴 머리와 둥근 얼굴 단아한 눈매, 오뚝한 콧날과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표정, 그리고 부드럽고 우아한 어깨선, 불상에 새겨진 아름다움 만으로도 신심이 절로 샘솟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안에 감춰진 힘입니다. 소원성취를 위해 선운사를 찾는 사람들은 반드시 도솔천 내원궁을 찾습니다. 이곳에서 지극하고 간절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운사에는 일 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과 기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대웅전
선운사의 대웅전(보물 제290호)은 500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나무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사시사철 그윽한 기품을 자랑합니다. 대웅전 안에 모셔진 삼존불은 흙으로 빚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대웅전에 흙으로 빚은 삼존불을 모셨다는 것은 전란 이후 그만큼 목재나 금속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선운사 재건 불사는 전란이 끝나자마자 시작되었습니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극한 마음을 모아 동참했고, 어느 한 곳 소홀함 없이 선운사가 재건되었습니다. 선운사 대웅전과 삼존불은 이곳이 오랜 세월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의지와 위로가 되었는지를 말없이 보여줍니다. 선운사가 자리한 고창은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고장입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가 되었고 가족과 집을 잃은 많은 전쟁 난민들이 이곳을 떠돌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창건된 선운사는 지장보살의 자비로 백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나라를 잃은 백성들에게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검단선사의 비법이 담긴 씨앗은 지장보살의 자비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천 년 넘게 선운사를 지키는 큰 숲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지장보살의 자비로 가득한 그 풍요로운 숲에서 당대 제일의 고승들이 탄생하였습니다. 도솔천 내원궁은 부처님의 고향이자 모든 불자들이 꿈에 그리는 극락입니다.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불자들은 극락을 꼭 닮은 곳을 찾아 기도하고 수행한다 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부처님이 어디에 계실까 상상을 해본다. 지상에 펼쳐진 극락, 그곳이 바로 도솔산 선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