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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불교의 시작을 열다` 아도 화상에 의해 세워져 1600백 년 동안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고,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심어온 호국불교의 본찰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비로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황악산 직지사

    경북 김천 대항면 황악산 동남쪽 산자수명 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입니다.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319), 대웅전 앞 3층석탑(보물 606), 비로전 앞 3층석탑(보물 607), 대웅전 삼존불탱화 3폭(보물 670), 청풍료 앞 3층석탑(보물 1186) 등의 문화재가 있습니다. 신라 눌지왕 2년(418)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저 산 아래 절을 지을 많은 훌륭한 터가 있다.` 1600여 년 전 아도화상은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듬해 아도화상이 황악산 아래 절을 세우니 바로 직지사이다.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은 고구려 출신의 승려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았던 신라의 땅에 불성의 씨앗을 심은 인물입니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신라의 공주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어 공주를 살리기 위해 왕은 아도화상을 궁으로 불렀다. 아도화상은 사경을 헤매는 공주를 위해 정성을 다하여 염불을 하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염불과 기도를 마치자 공주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습니다. 공주의 병이 씻은 듯이 낫자 왕은 기뻐하며 아도화상에게 소원을 물었다.`빈승은 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절을 세워 불교를 널리 펴고 국가에 복을 빌고자 합니다.` 이에 왕은 아도화상이 절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고 신라에 불법이 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직지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하면서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직지사가 사세를 떨친 것은 고려 시대로 태조 왕건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927년 왕건은 치열한 전투 끝에 후백제의 견훤에게 대패하게 되고, 이때 왕건은 패전병을 이끌고 직지사로 도주하였는데 당시 주지였던 능여대사는 군사들에게 많은 짚신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짚신을 눈밭 위 사방으로 뿌려놓았습니다. 다음 날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재차 왕건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눈밭에 흩어진 짚신을 본 견훤의 군졸들이 이를 줍기 시작합니다. 이 틈을 타 왕건은 무사의 개성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능여대사의 은혜에 보답하였습니다. 그 후 직지사는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직지사의 운명이 위태로워진 것은 임진왜란 때였습니다. 직지사는 왜군들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일주문, 비로전, 천왕문을 제외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왜군들이 직지사를 훼손한 이유는 사명대사 때문이었습니다. 왜군은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병에게 번번이 패배하자 보복을 한 것입니다. 해동 불교의 발원지 대가람 직지사는 그렇게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후 쇠락의 길을 걷던 직지사는 1963년 성역화 불사를 시작 하면서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천 년이 훌쩍 뛰어넘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직지사에 신축 건물들이 유난히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600여 년을 맞이하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동국제일가람이자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가 출가하고 주지를 역임한 호국불교의 본찰이기도 합니다.

     

    대웅전 삼존불탱화

    직지사에 소장된 주요 국가 지정 문화재는 모두 다섯 점이 있습니다. 이중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영조 20년에 그려진 대웅전의 후불탱화 입니다. 길이가 6m가 넘어 아주 길게 늘어진 이 세 점의 후불탱화는 영조 20년(1744)에 그려졌고 비단 바탕에 적색, 녹색, 황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했는데 약간 어두운 감이 있으나 차분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배색에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게 됩니다. 이렇게 삼존불 뒤에 세 폭의 불화를 각각 봉안한 점이라든지 본존불의 광배에 물결 같은 무늬를 가득 채운 점 등은 조선 후기 불화의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세로로 긴 화면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그 구성이 짜임새 있고 세부까지도 묘사가 치밀하여 조선 후기 불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며, 보물 제6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비로전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사찰의 중심이라면 직지사를 상징하는 공간은 비로전입니다. 비로전은 임진왜란 당시 거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탔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하여 천불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비로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법당을 가득 메운 천 개의 불상 중 고추를 내놓은 탄생불이 하나 숨어 있는데, 법당에 들어설 때 이 탄생불을 가장 먼저 발견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합니다. 속설이긴 하지만 비로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소원을 성취했다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전해지면서 일 년 내내 기도와 염불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중 금동 자물쇠는 우리나라에 두 개밖에 전해지지 않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석조약사여래좌상은 특유의 부드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보물 3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외 선산 도리사에서 발견된 금동육각사리함은 정교하고 유려한 신라 시대 공예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성보박물관에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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