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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형상의 바위가 많아 바위동물원으로 불리는 금산.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금산 정상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드리고 조선왕조를 열었다고 전해지는 관음 성지 남해 보리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남해 보리암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원효대사께서 창건하고 수도하시던 절로서 금산의 한복판에 관음봉을 기대고 위치한 유서 깊은 암자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입니다. 남해 금강이라 불리는 삼남 제일의 명산 금산(704m)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38 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신라 원효대사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라 불렀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젊은 시절 이 산에서 백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자 영세불망의 영산이라 하여 온 산을 비단으로 두른다는 뜻으로 금산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종 1년(1660)에는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액하였습니다. 정상에는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있으며, 불타오르는 여명이 바다에서 솟구쳐 오르는 금산의 일출은 3년 동안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 하며 그 장엄함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합니다. 현존하는 당으로는 보광전을 비롯하여 간성각,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습니다. 보리암 주차장에서 대략 15분 정도 걸어가면 보리암에 도착할 수 있으며 걸어가다 보면 중간중간 보이는 바다 조망과 금산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보이므로 산책하면서 걸어가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 생각이 됩니다. 절 뒤에 관음봉은 바위의 장엄한 기운이 뭉쳐 의젓한 모습으로 용을 타고 전후좌우로 절을 하는 남순동자 바위와 관음조가 읊조리는 듯한 바위들을 거느리고 남쪽 바다 용왕에게 무슨 가르침을 내리는 듯합니다. 보리암은 이런 바위들을 등지고 놓여 있습니다. 생긴 그대로 절이며, 바위머리마다 자연법당인 이곳은 그늘이 짙은 사부대중들의 기도 수도처라 할 수 있으니 뉘라서 이곳을 아니 그리워하랴, 보리암은 고대로부터 유래가 깊어왔으니 고대의 가락국 김수로왕도 이곳에서 기도하고 대업을 이루었다고 하며 왕의 칠왕자도 외숙인 장유국사 옥보선인을 따라 출가하여 남해 낙가산 금산 보리암에서 수도하다가 다시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 반야봉에서 수도하여 견성성불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불교 남방전래설을 증명하는 것으로 북방전래설보다 292년 앞선 기록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출세도인과 현인달사가 여기를 찾아와서 수도하여 가피력을 얻은 이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사명이 상도솔암, 의상암으로 지명사전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신각의 현판은 산령각이라 되어 있으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별지화로 매화가 그려져 있고 좌우측에 신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산신각의 내부에는 호랑이 위에 앉은 산신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금산의 이름은 고려 후기 이성계가 이 산에서 100일 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된 그 영험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 해서 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보리암의 주법당으로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는 보광전은 신라 신문왕 3년(683) 초창 이래 여러 번의 중건 중수를 거쳤으며 보광전에 모신 주불은 서천축 아유타국 허공주가 모시고 왔다는 관세음보살(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용)왕 삼존상입니다. 보리암 범종각은 일체 지옥중생과 만경창파 수륙고혼의 이고득락과 해탈을 염원하고 있다. 보리암에서 바라보는 금산의 기암과 남해 바다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어디서든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장엄한 풍경입니다. 보리암에서 가장 기가 강한 곳으로 알려진 해수관세음보살상은 1991년 한 기업가의 원력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 지형적 영향으로 육로로 운반할 수 없었던 해수관세음보살상은 헬기를 이용하여 탑대에 안치하게 되었습니다. 좌대는 연꽃 문양으로 하좌대와 상좌대로 이루어져 서로 마주 보게 포개져 있습니다. 왼손에는 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가슴에 두었습니다. 위습은 양어깨를 감싸고 각각의 팔을 휘감으며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흘러내린 옷깃은 그 끝이 살짝 들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입니다. 이곳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만은 꼭 들어주는 영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하루종일 참배객이 끊이지 않은 곳입니다. 한 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고 가는 이 해수관세음보살상은 보리암의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보리암전 3층 석탑은 가야 김수로 왕비 허왕후가 인도에서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를 못하는 중 파사석을 싣고 무사히 건너왔다고 합니다. 이 석탑은 원래 김해시 구지봉 산아래에 있는 호계사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그 후 원효대사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탑은 고려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어 후세에 새로 축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침판이 방향을 잡지 못할 정도로 우주의 기가 모여있다고 합니다. 해수관음상과 함께 탑돌이를 하며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장소입니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효대사가 절을 짓기 약 600년 전에는 가락국 김수로왕이 수행 차 이 지역을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수로왕의 부인은 인도 아유타국 출신 허황후인데, 보광전에 모신 주불은 허황후가 인도에서 모시고 왔다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불교는 서기 372년 고구려를 통해 중국에서 처음 전래(북방불교) 됐다는 기록보다 약 300년 앞서 인도에서 직접 들여왔다(남방불교)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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