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원오국사, 각진국사 등 고승들이 머물렀던 유래 깊은 사찰, 쌍계루, 명승 제378호 백학봉, 천연기념물 비자나무 숲 등 특히 단풍으로 유명한 장성 백양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장성 백양사
내장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이곳은 백제 무왕 33년(632)에 창건된 사찰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수많은 문화재도 보유하고 있는 곳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극락보전, 사천왕문, 소요대사 부도, 대웅전, 칠성각, 진영각 등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 숙종 때 건립된 쌍계루는 연못에 비치는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입니다. 입구에 위치한 비자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남도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천년 고찰, 호남에선 `봄 백양, 가을 내장` 이란 말이 오늘날에도 회자가 됩니다. 사격과 풍광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이 구절은 아마도 백양사가 한때 내장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절집이 아닌 내장산을 내세우는 이유는 1971년 11월 내장산, 백암산 일대를 내장산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자연스럽게 각인된 것 같습니다. 백암산 꼭대기인 상왕봉에 자리한 운문암은 많은 큰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선객이라면 한 철 공부하고 싶은 참선 수행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고불선원은 1914년 만암 스님이 세웠으며, 서옹 스님께서 `참사람 운동`을 실행한 곳입니다. 이처럼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선불교 법통을 이어온 큰 스님들이 주석하며 수행과 교화를 하였던 참선도량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백양사란 이름의 유래지인 영천굴로 가는 길에는 약사암이 있습니다. 여기서 백양사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백암산 품에 안긴 백양사는 주변에 빼어난 경관과 함께 어우러져 청량한 기운을 내뿜어 수행의 가장 좋은 도량임을 뽐내는 듯합니다. 약사암을 지나 영천굴에 도착하면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지금의 백양사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굴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 소멸하여 다시 천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라며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있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양사는 조계종 최초의 총림입니다. 총림은 선원, 강원, 율원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합니다. 백양사의 율원인 청류암은 율을 연구하고 계율수행을 하는 율사 스님들이 계신 곳입니다. 백양사의 강원은 경내에 있는 화음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학 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강원은 삼국시대에 사찰 내에 강당을 짓고 경학을 강설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승속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 하여 붙여진 고불총림입니다.
백학봉
눈에 띄는 것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편 듯한 모습의 백암산 백학봉이 병풍처럼 둘려 있고 앞으로는 맑은 옥류가 흐르니 배산임수 천혜의 명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백암산 학봉의 기암괴석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기상과 기운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일대의 암벽과 식생 경관이 아름다워 2008년에 명승 제378호로 지정되었고,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혀왔을 만큼 이름난 곳입니다. 남도 제일의 경승지로 꼽힐 만큼 그 풍광이 뛰어난 곳입니다.
쌍계루
우리나라에서 가을 단풍으로 가장 손꼽히는 내장산 국립공원, 내장산 국립공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눠집니다. 내장사가 있는 내장산과 백양사가 있는 백암산 구역입니다. 내장사는 전북 정읍시, 백양사는 전남 장성군에 속합니다. 두 곳 모두 가을 단풍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지만 백양사에는 하얀 백학봉을 뒤로하고 수정같이 맑은 못을 이루는 자리에 쌍계루가 있습니다. 단풍이 절정일 때 여행객은 물론이고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자리다툼을 하는 명소입니다.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백암사(백양사)가 알려진 것은 고려 말 쌍계루가 중건되면서 목은 이색이 기문을 짓고, 포은 정몽주가 시를 쓰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이후 목은과 포은을 기리는 시인과 묵객들이 쌍계루를 방문하여 남긴 시가 200편이 넘는다고 합니다. 쌍계루 앞 연못에는 만암 큰스님의 자비심이 녹아들어 있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몇 년째 흉년이 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을 위해 절 양식을 줄여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농사 수확이 끝난 농민들이 절에서 도와준 은혜를 갚겠다며 양식을 짊어지고 절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만암 큰스님은 `다시 받기 위해 나누어준 양식이 아니니 도로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농민들은 `오늘 우리가 가지고 온 이 양식으로 스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 바치는 시주로 여기시고 부디 받아주십시오`라고 통사정하며 물러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만암 큰스님은 농민들이 얻어먹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고 다시 갚아야 하는 부담도 덜어주면서 자신들이 일한 대가로 받은 품삯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백학봉 양쪽에 흘러내리는 개천에 보를 설치하여 연못을 만들게 하고 품삯을 후하게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만암 큰스님의 빈민 구제대책이라 할 수 있는 설화입니다. 백양사를 오늘에 이르게 한 또 한 분의 스님이 계십니다. 만암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신 서옹 스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서옹 스님은 만암 큰스님에 이어 `참사람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제시하여 중생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행복을 전하고자 전개한 결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