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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 크기인 미륵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미륵전, 해동미륵신앙의 성지로 불리는 김제 금산사, 미륵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김제 금산사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 자락에 위치한 금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입니다.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 해동미륵신앙의 성지로 손꼽히는 사찰입니다. 일대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모악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성스러운 치유의 터전이라 하여 어머니의 산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모악산에 위치한 금산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1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천년 고찰입니다.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된 유가 종찰입니다. 미륵성지로서 호남의 관문 사찰 역할을 해왔습니다. 삼국시대 후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을 볼 수 있는 주요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곳입니다. 미륵전(국보 62), 대장전(보물 827), 명부전, 나한전,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 등이 있고, 석련대(보물 23), 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24), 5층석탑(보물 25), 방등계단(보물 26), 6각다층석탑(보물 27), 당간지주(보물 28), 석등(보물 828)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쇠락과 재건을 거듭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포근하고 아늑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곳입니다. 사적에 의하면 백제 법왕은 금산사를 창건한 후 38인의 승려를 득도시켰다고 합니다. 신라 오교 중 하나인 법상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신라 최고의 고승으로 불리는 진표율사가 중흥을 이끌었습니다. 신라 오교는 통일신라시대 경교를 공부하는 다섯 종파인 열반, 남산, 법성, 화엄, 법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 진표율사는 장난 삼아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놓고는 이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봄날이었습니다. 진표율사는 버드나무 가지에 꿰인 개구리들이 힘겹게 한 줄로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에 진표율사는 크게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하여 가르침을 받습니다. 10년 넘게 수행을 한 어느 날, 진표율사는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부지런히 수행하면 계를 받기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이에 스승이 답했습니다. `너의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대답을 들은 진표율사는 계를 받겠다는 발원을 세운 뒤 수십 일 동안 망신참법을 행하여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하고 업장소멸을 기도하였습니다. 망신참법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죄를 참회하는 구도 방법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미륵보살을 친견하게 됩니다. 지독한 참회와 극한의 수행으로 구도를 행한 진표율사의 보살행은 백성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금산사는 고려 문종 때, 왕사였던 혜덕 스님에 의해 다시 한번 도약의 기회를 맞게 됩니다. 혜덕 스님은 법당을 증축하고 법회를 주관하며 대찰의 면모를 완성하였습니다. 이어서 문종의 아들 도생승통 스님이 주지를 겸임하면서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중요 석물인 석련대(보물 23), 5층석탑(보물 25), 노주(보물 22)등이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로 추정됩니다. 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오랜 세월 백성들의 삶을 위로해 온 금산사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그 역할을 조금 달리하게 됩니다. 그 계기는 바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금산사는 전라도 지역 승병의 본부 역할을 하며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정유재란 당시 왜병이 저지른 방화로 인해 경내에 있는 모든 건물과 40여 개의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백성들의 든든한 의지처이자 신앙 처가 되어주었던 금산사의 복원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습니다. 선조 31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인조 1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는 불교를 멸시하며 억압하던 조선 시대에 왕실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이뤄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백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던 것은 현세가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세에 행복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백성들에게 미륵신앙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미륵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모든 이들은 업장과 번뇌의 장애를 끊고 아라한과를 성취한다고 합니다.

     

    미륵전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주었던 간절한 그 신앙의 상징이 바로 금산사 미륵전에 계신 미륵부처님 입니다. 금산사 미륵전은 신라시대부터 미륵 본전을 봉안했던 금당으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로 이루어진 목조건물입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4차례에 걸친 중수를 통해 완성된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으로 일명 용화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중건한 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1,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로 지붕은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입니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습니다. 건물 내부는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인 구조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여러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합니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건축물입니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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