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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의 근본 도량으로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을 담은 화산 용주사, 홍살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화산 용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입니다. 1911년에는 30 본산의 하나로 수원, 안성, 남양, 죽산, 진위, 음죽, 용인, 고양, 시흥 등에 있는 49개 사찰을 관장하였습니다. 용주사는 정조 14년(1790) 2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10월 6일 완료하게 되는데 공사에 소요된 총기간은 216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완성된 건물은 대웅전 9칸, 칠성각 6칸, 향로전 12칸, 제각 6칸, 선당 39칸, 승당 39칸, 천보루 15칸, 좌우종루 4칸, 외삼문 3칸, 좌우익루 3칸, 동문 9칸, 춘가 2칸입니다. 용주사는 왕실이 공사를 발주하고 관청이 재원을 조달하는 등 건립 계획부터 공사감독까지 일관되게 국가가 주도한 관영공사로 이에 대한 기록은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사찰사료 등을 통해 공사 내용과 재원, 집행, 인력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가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용주사는 극락왕생을 위한 지극한 효심이 깃든 사찰입니다. 신라 문성왕 16년에 갈양사로 창건되었습니다. 고려 광종 때에는 왕실이 주관한 수륙재가 최초로 행해졌던 곳입니다. 이후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조선 정조 14년(1790)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전한 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낙성식이 있던 날 저녁, 정조 임금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사찰의 이름을 용주사라 지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명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 영조 임금이었다. 영조는 아들에게 칼을 내리며 수차례 자살을 명했지만 사도세자가 이를 거부하자 그를 뒤주에 가둔 후 자물쇠를 채워버린다. 1762년 윤 5월 13일,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뒤주에 갇힌 세자는 8일 동안 신음하며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그때 사도 세자의 나이 스물여덟, 세손이었던 정조의 나이는 겨우 열한 살에 불과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은 정조의 가슴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1776년 마침내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과 함께 그의 시대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조는 결코 부친의 비극과 정치를 혼돈하지 않았고, 그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성군이자 동시에 효자였던 정조에게는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것이 정조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자 괴로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조는 보경스님이 바친 `부모은중경`을 읽고 마음속으로 깊이 감동하였고 마침내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조는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천하제일의 명당 수원 화산(현륭원)으로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했다. 현륭원의 이장을 무사히 마친 정조는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용주사를 세웠다.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키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서였다. 생전에 못한 효도를 다하기 위해 정조는 용주사 대웅보전 옆에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전각)을 짓고 하루 여섯 번의 재를 올리도록 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고 용주사를 창건하던 해,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는 왕실이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순조를 잉태한다. 정조는 수빈 박씨가 잉태한 아들이 아버지가 점지해 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정조에게 용주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아있는 아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손자를 연결해 준 소중한 곳이었다. 또한 용주사의 창건은 단순히 정조의 개인적인 소원 성취나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뿐 아니라 정조가 꿈꾸는 상생과 화합의 정치의 완성이기도 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이장한 후 매년 한 해도 빠짐없이 용주사를 찾았다. 임금의 행렬이 자주 머물다 보니 용주사는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매우 특별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일단 입구부터 궁궐 혹은 사대부가의 대문 같은 모습이다. 또한 계단에는 삼태극과 모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전통적인 불교 예술이 아닌 당대 유행하던 왕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홍살문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액을 막아주는 홍살문이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정조가 용주사에 굳이 홍살문을 세운 이유는 살아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괴롭혔던 원혼들이 이곳에 만큼은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모든 중생을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약사여래부처님이 서쪽으로는 모든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어 사도세자를 위로하는 정조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정조는 용주사에도 왕실의 보물들을 아낌없이 하사하였는데 대웅보전의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경기도 향토문화재 제11호 금동향로와 제12호 청동향로 역시 조선 초기부터 왕실에서 사용해 왔던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 가장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세자의 영혼이 완전히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가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왕실 최고의 성군이자 최고의 효자였던 정조 임금의 간절하고도 아름다운 효심이 깃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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